역사적인 사건을 둘러싼 의문점과 이에 대한 해답 중에서 유일하게 남게 되는 빛나는 진실은, 과거를 어루만지는 치유만이 다음 세대의 정의를 이끌어낸다는 사실 하나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무장저항 속에서 탄생한 ‘제주도 4 ․ 3항쟁’은 바로 우리가 치유해야만 하는 아픈 과
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
제주도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폭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역사적사건은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편향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제주43사건은 5.16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긴 세월동안 금기시되는 주제였다. 그러
제주도민에게 막대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
이 폭동의 발발 이유와 그 배경을 고찰한 이 글은 이 목동이 우연히 혹은 어떤 하나의 계기에 의해서만 도발된 것이 아니라 제주도민이 조선시대 말기부터 겪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과 해방 당시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던 사회·경제적 상황 및 미군정
제주도 - 4.3항쟁
1) 제주 4.3사건의 발생 직접적인 원인
4.3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3·1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의 희생자를 내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제주도청
사건으로 풀이했다. 이 외에도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이를 터뜨린 것이 제주도사태의 진상”이라는 등 관공리의 부패와 경찰의 가혹행위, 서북청년단의 만행 등을 사태의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최근 4.3은 북한이 지령이 아니라 남로당제주도당의 독자적인 행위임이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대해 주변사람들이 항의하자 경찰들은 이것을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해 총을 발포하였다. 이 결과 일반 주민 6명이 사망하였다. 이를 3․1 발포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제주도당은 반경(反警)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
많았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이 더러 있었다.” (김계유, <현장증언:1948년 여순봉기>. 『역사비평』, 제 15호, 249쪽.)
47년 6월 3일 광주 4연대의 영암경찰서 습격사건, 다음해 10월 광주 4연대 일부 병사들이 순천경찰서를 습격한 사건(
올로기적 대립의 역사적 뿌리를 파헤치면서 이를 거시적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역사적 흐름을 개관하면서도 등장 인물들의 개성적인 삶의 숨결까지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역사적 시각이 작품 속에 하나의 큰 줄기로 관류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태백산맥>은 여순 반란 사건 이후로부터 농지
상황입니다. 남로당의 개입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했다는 점, 지금의 이념적 잣대로 과거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 있는 이 때 당시에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증인들, 4.3사건과 관련된 증거 및 물품 등 사실의 역사 그대로를 평가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